역사학에서 학생의 잠재력

Сегодня, 17.02.2017, впервые в практике ведения сайта произошло нечто, вызвавшее мое изумление, между тем и восхищение. Утром был опубликован труд студентов Курск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Студенческий потенциал в исторической науке…”, а уже вечером “постучался” ко мне Dong Hyun Woo с просьбой дать разрешение перевести статью курских студентов на корейский язык. Конечно, дал разрешение, еще не оповестив об этом руководителя проекта профессора Селиванова И. Н., а как только оповестил профессора, почти в тот же момент у меня появилась ссылка на статью на корейском языке. Мне показалось это чудом, которым делюсь с читателями.

역사학에서 학생의 잠재력

원문 링크.

* 이하 본문에서 대괄호 안의 설명은 역주임. 추가로 미국회도서관 소장 장학봉 옹의 수기를 참고할 것.

역사학에서 학생의 잠재력. 쿠르스크국립대 역사학과에서 고려사람[소련계 한인/조선인, 이하 고려사람으로 통일]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려는 시도.

역사적 조국에서 고려사람의 역사에 관한 쿠르스크국립대의 연구 프로젝트가 역사학과 학생들의 주의를 끄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전문성을 갖춘 역사학자 및 국제정치학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 작업은 ‘국제관계의 역사'(지도교수 – 이.엔. 셀리바노프 교수) 프로그램에 소속된 대학원생 및 학부생 주축의 학술동아리인 ‘클리오'[역사의 신](지도교수 – 이.아. 코노레바 교수) 소속으로 장차 ‘역사’를 전공하려는 학부생이 수행하고 있다.

아래는 1945~1961년 북한에서 근무한 뒤 타쉬켄트에 정착한 고려사람의 친지들이 제공한 글과 사진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이반 골리코프, 나탈리아 모스칼렌코, 파울린 플라스키나가 작업하였다. 프로젝트의 다른 성원들은 조만간 다른 고려사람 여섯 명의 전기(傳記)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교수들은 이하의 자료가 고려사람 사이트를 찾는 방문객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고 새로운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서책 형식으로 <북한의 고려사람>을 간행하는 데 필요한 작업들이 계속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고려사람> 출판은 현재 쿠르스크국립대 역사학과에서 준비 중이다.

이리나 코노레바 – 쿠르스크국립대학 역사학과장 및 연구교육소장

이고르 셀리바노프 – 쿠르스크국립대학 일반사 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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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활

김영활은 연해주 태생으로 1910년 쇠락한 조선인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곧 아버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는 역사적 조국[조선]에 거주하는 형제에게 가던 도중 첩자로 의심을 받아 [조러]국경에서 매맞아 죽었던 것이다. 당시 김영활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지만, 생계를 위한 허드렛일과 학업을 성공적으로 병행하였다. 그는 극동국립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했는데, 친척의 증언에 따르면, 동양어(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노어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김영활

1937년 고려사람 강제이주 당시, 그는 아스트라한으로 옮겨져 어육가공공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가 타쉬켄트 지역(oblast’)에 위치한 집단농장 ‘볼셰빅’에 부설된 학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1941년 김영활은 전연방공산당(볼)에 가입하였다. 1944년 그는 당조직자로서 조선극장으로 이동하여 근무하게 되었으나, 곧 붉은 군대에 동원되어 일제의 점령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극동전선 제25군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946년 그는 동원에서 해제됐고, 한국어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북조선에 통역원으로 잔류하였다. 1948년 소련군이 철수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 김영활은 북한에 남아 <쏘베트 신보>에 취직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조선인민군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조쏘친선>의 책임편집자직을 맡아 근무하였다. 1957년 김영활은 최고인민회의 위원장 최용건의 비서를 맡았다.

통역원으로 복무할 당시의 김영활(왼쪽에서 세 번째), 평양

1961년 김영활은 가족과 함께 타쉬켄트로 돌아왔으나, 곧 유즈노사할린스크의 [당기관지인] <레닌의 길> 신문사의 편집원으로 파견되었다. 1965년 그는 크즬오르다로 이사하였다. 새로운 곳에서 그는 <레닌기치> 신문사의 편집자가 되어 1968년까지 근무하였다.

1968년 이후 <레닌기치> 신문사의 언론인 김영활은 카라칼파크스탄 공화국 및 호레즘 지역의 통신원이 되었다.

1978년 사망했다.

가족에 대해서

김영활의 가족

김영활은 31세의 나이인 1941년 유가이 스베틀라나 막시모브나와 결혼했고, 그때 당시 이미 타쉬켄트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듬해 부부는 첫 자녀를 보았는데, 바로 딸인 클라라였다.

1946년 가족은 북조선 땅에서 재회하였다. 1950년에는 두 번째 자녀인 아들 아나톨리가 태어났다.

아내 유가이 스베틀라나 막시모브나와 김영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가족은 타쉬켄트 지역으로 대피하였다. 가족의 재회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가능했다. 1954년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비사리온이었다. 1961년 김영활은 가족과 함께 타쉬켄트 지역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있는 김영활, 평양

딸 클라라는 지역경리전문학교를 나와 주택사업소에서 근무하였다. 아들 아나톨리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사업에 종사하였다. 둘은 현재 모두 은퇴한 상태이다. 차남 비사리온은 멘델레예프 명칭 모스크바 화학기술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뒤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같은 대학에서 부교수가 되어 교질화학(膠質化學)을 가르쳤다. 2005년에 사망했고 현재 타쉬켄트에 묻혀 있다.

자료 준비: 골리코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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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철

조영철은 1909년 12월 14일[장학봉은 13일이라고 썼다] 원동 포시예트 구역의 남촌[장학봉은 함경북도 길주군 화대면 하평촌이라고 썼다]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1924년까지 소학교에서 공부한 뒤, 부모와 일했고 제재소(製材所)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1930년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에 소재한 사범전문에 입학했고, 졸업한 뒤인 1933년에는 원동주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브카 아조프 구역의 한 마을로 파견되어 근무하였다.

조영철

1937년 강제이주의 결과로 조영철은 종래의 교직을 포기하고, 아내인 유가이 나제즈다 일리니치와 타쉬켄트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새롭게 정착한 곳에서도 조영철은 지식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즬오르다의 사범전문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와 타쉬켄트 지역 싀르다리야 구역의 고등중학교에서 선생님이 되었다.

1941년부터 조영철은 타쉬켄트 지역의 <새로운 길> 집단농장에서 근무하였다. 그의 삶은 1945년에 들어와 크게 바뀌었다. 붉은 군대에 징집돼 북조선으로 파견됐고, 거기서 그는 한국어로 발행되는 평양 신문인 <조선신문>의 문학교정원으로 근무하였다.

<조선신문> 편집부

1942년부터 1947년의 기간 동안, 조영철과 아내 나제즈다 일리니치의 삶은 몇 번의 즐거운 사건으로 특징지어진다. 1942년 그들의 첫째 아들인 발렌찐 (이후 기술과학 박사)이 태어났고, 3년 후에는 차녀 벨라가 태어났다. 1947년에는 막둥이 로자가 태어났다.

조영철은 한국전쟁에도 참가하였다. 당초 그는 후방사령부 특별군정대표가 되었고, 1년 후에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제6부[문화기재 담당]장에 임명되었다.

조영철

한국전쟁이 끝난 후, 조영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건성 부상에 임명돼 1959년까지 근무하였다.

가족과 함께. 평양, 1959년

1960년 조영철은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왔고, 한동안 이르쿠츠크 지역 안가르스크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부소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1961년 그는 다시 거주지를 바꿨고 타쉬켄트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그는 키로프 명칭 공원 소장(1962~1963)으로 근무했고, 공화국에서 수여하는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기까지 7년간 쉬지 않고 근면하게 농업 부문에서 일하였다.

수년간, 조영철은 “대일전 승리” 훈장, “조선해방” 훈장 등 소비에트 훈장을 수여받았고, 북한 국기 2급 및 3급 훈장과 함께 “자유를 위하여” 훈장을 받았다.

조영철은 1980년 사망했고, 타쉬켄트에 묻혔다.

자료 준비: 모스칼렌코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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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이 니콜라이 안드리예비치 (유성걸[노어로는 “유성철”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오기이다. 유성걸과 兪成哲은 다른 인물이며, 유가이는 유성걸이다])

유가이 니콜라이 안드리예비치 (한국 이름 – 유성걸)는 원동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노어로는 노릴스크-우스릴스크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분명한 오기이다]의 노동자 가정에서 1920년 3월 20일[장학봉은 13일이라고 썼다] 탄생했고, 가족의 유일한 자녀였다.

유가이 니콜라이 안드리예비치(유성걸)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유가이는 부모와 함께 타쉬켄트 지역 치나스에 정착했고, 거기서 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1942년 우즈베키스탄국립대학을 졸업하였다. [고등]교육을 받고 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에 유가이는 학업을 마친 후 양기율의 한 고중[제11호 고중]에서 노어노문을 가르치게 되었고, 동시에 교무주임을 겸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하였다.

1945년 2월 3일 유가이는 전연방공산당(볼)에 입당하였다. 바로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급격하게 변하였다. 1945년 10월 유가이는 붉은 군대에 징집되었고, 곧바로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25군은 북조선에 주둔하였다. 한국어와 노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1945년 11월 9일 군사통역원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부터 유가이는 조선인민군 제11항공독립교도사단 정치부장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10월부터 1955년까지 소장 계급으로서 조선인민군 비행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10월부터 그는 평양외국어대학 부교장으로 지냈다.

1960년 4월 그는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갔다.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 나들이

그는 소련 국방부의 도움을 받아 소련군 소령 계급으로 타쉬켄트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우즈베키스탄공산당 고급당학교에서 4년간 공부하였다.

아내와

1964년 [고급당학교] 졸업 후, 그는 타쉬켄트의 레닌 구역 내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88년 은퇴하여 연금생활에 들어갔다.

아내와 자녀와 함께

유가이와 아내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다. 유가이는 1994년 타쉬켄트에서 사망했다.

자료 준비: 플라스키나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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